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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 야,
어느날 갑자기 학교 언덕을 올라가기 힘들다고 느껴질 때, 공대건물까지 거리가
유난히 멀게 여겨질 때 혹은 비오는 우울한 날 버스타기가 싫어지고 횡단보도
건너편에 검은색 차가 세워져 있을 때 가슴이 철렁하는 대신 행여나 하는 기대를
순간 하게 되고, 그럴 때만이라도 날 기억할 수 있겠니?
노트북 자판을 두들기다 문득, 갑자기 어디선가 불쾌한 담배냄새가 풍겨올 때 문득,
어디선가 카톡 소리가 들릴 때 또 문득, 어쩌면 길을 걷다가 느닷없이 초라한 뒷모습의
아저씨를 보고서도 날 떠올려 줄 수 있겠니?
우리의 두 달 간의 만남이, 어쩌면 나 혼자만의 것이었는지도 모를 사랑이 이제 끝이 났구나.
예감은 늘 하고, 마음의 준비는 항상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벼락처럼 다가온 그 이별이
K보다 20살이 넘는 나이에도 낯설고 아프기만 하다.
영화처럼 멋진 만남이 아니고 대행으로 시작된 만남이라도 순간들의 기억은 아름답기만 한데
이별은 또 흔한 드라마처럼 오해로 끝나게 되었다.
무슨 말을 해도 소용이 없음을 아는 터라, 그저 혼자 삭히는 수밖에 없음이 안타깝다.
험난한 시박생활을 하면서 보낸 시간들이, 힘들고 화도 많이 났지만 네게 메일로 말한 것처럼
K를 만나면서 그저 내겐 행복하기만 한 시간이었다.
아직도 넌 키티 공책을 쓰고 있을 것이고, 네 마음 어느 구석엔가는 나의 자취가 남아 있을테니 내가 더 이상 무엇을 바랄 수 있겠니.
떠나보내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못 해준 것이 아쉬울 뿐, 행여 내게 무엇인가 돌려줄 생각은
할 필요가 없단다, 바보 K야.
하루종일 비가 왔다. 내일은 하루종일 여유가 있다...
혹시 만날 수 있을까 기대했는데. 어젯밤에 이미 이별의 메일은 도착했더구나.
K는 아무 잘못 없다.
내가 더 의연하고 더 여유있게 보듬어주고 안아 주어야 했는데
한 달이나 널 보지 못했기에, 네 목소리를 너무 듣고 싶었기에 내가 초조했나 보다.
사랑이라는 것은, 어떤 허물도 감싸 안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으면서도 난 한 구석에서
널 안아주지 못했으니 네게 그 이상을 기대하는 것도 무리겠지.
K야,
하지만 대행은 하지 않고 살았으면 한다.
내가 살아 있고 내 통장에 최소한의 잔고가 있는 한 네게 보낼테니 가급적 대행하지 말고
열심히 공부해서 장학금 타면 좋겠다.
그래서 남들보다 더 보람된 졸업장을 타서 멋진 회사에 취직하고 또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면 좋겠다.
지친 내 마음에 활력을 불어 넣어준 것만으로도, 내 삶에서 가장 행복한 마지막을 보내게
해준 것만으로도 난 네가 무한히 고맙고 사랑스럽단다.
이제 가진 것도 별로 없긴 하지만 앞으로도 조금의 불편은 덜어줄테니 이곳에 오지 말고
가급적이면 이 글도 읽지 말고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다.
흔한 말이지만 연꽃은 진흙에서 핀다고 하잖아.
K의 맑은 영혼도 그 힘든 환경에서 더 아름답게 꽃피게 될 것이라 생각하고 다시는 힘들어
하지 말고 꿋꿋하게 생활하렴.
가끔 비가 구질맞게 오는 날이면, 늘은 아니라도 좋으니 문득 내 생각을 해주렴.
이 세상에 어떤 멍청한 남자가 있어 어울리지 않는 바보같은 사랑을 하고 가더라고
그렇게라도 기억해주렴.
그럴 일은 없겠지만 어쩌다 내 이름 끝자라도 네 사랑스러운 입술에서 흘러 나온다면 난
멀리 있어도 그 소릴 들을테고, 네게 미소지어줄 수 있을 거다.
할 수만 있다면 네 그림자가 되어, 네 수호천사라도 되어 널 지켜주고 싶다만, 세상 일이
그렇지 않다는 걸 알만큼 나이를 먹었기에, 허튼 약속은 하지 못하겠다.
이별만은 약속처럼 깔끔하게 퇴장할테니, 그만큼 행복하렴.
마지막 한 마디는 괜찮지?
많이 사랑했단다, 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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